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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종이는 가지런하게 놓여 있어 그런 색상에서 흔히 연상되는 요염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곱게 걸린 먹의 향기가 큰 역할 하는 것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이것을 준비한 사람은 사련인데, 그가 대체 종이에 무슨 다른 생각을 더 품겠는가. 사련에게 종이와 붓이란 그저 그 뿐이었으니, 다른 의미가 없는 것 정도야 당연한 일이다. 다만 화성은 이 상황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었다. 눈썹을 가늘게 찡긋거리는 표정이 뚱하다. 붓을 툭 들었다, 놓았다 하는 건, 어린아이도 아니고…. 사련은 이것이 가벼운 투정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채다. 애초에 정말로 불만이 있다면 저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처럼 행동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 사련은 짐짓 엄하게, 힘을 준 어조로 화성을 불렀다.

 “삼랑아.”

 화성은 언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냐는 양 빙글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둥글게 휜 입술 새에서는 짓궂음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혀엉. 답지 않게 꼬리를 늘인 말투가 애교스럽다. 하지만 사련은 아직 뜻을 굽힐 생각이 없었다. 새해에는 반드시 삼랑의 나쁜 버릇을 고치기로 마음 먹었으니! 단단히 각오를 다진 사련은 고개를 저으며 붓을 들었다. 보송보송 말라 있던 모필이 먹으로 젖어간다. 그것은 화성의 손 안에 쥐어졌다. 주먹 쥔 손의 힘을 풀어버리지는 않는 것이, 사련이 직접 들려준 것을 대강 놓아버릴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그 모습이 퍽 귀엽게 느껴져, 사련은 헛기침을 두어 번 해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풀어지는 표정을 다잡을 도리가 없다. 붓은 총 두 개로 남은 하나는 자연스럽게 사련의 손으로 들어갔다. 좋아, 삼랑아. 내가 먼저 쓸 테니 네가 그 다음을 써주는 거야. 이 말투는 그로서는 드물게도 반론의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이었다. 화성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사련은 새어 나가려는 웃음을 참으며 글씨를 써내려 가야했다. 곧 세로로 긴 종이에는 네 글자가 새겨졌다.

 天官赐福

 이것은 망설임 없이 빠르게 생겨나, 금방 화성을 재촉했다. 의미 없이 시간을 끌던 화성도 결국에는 손을 움직였다. 하지 않으려 꾸물거린 동안에 비해 그 속도는 대충 쓰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빠르다. 그것은 말 그대로 의심에 그쳤다. 사련이 함께 하는 데에 그가 무언가를 대강 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결과에 다시 한 번 의심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사련은 자신은 그 글씨의 알 수 있다는 사실로 만족하기로 했다. 다른 누군가는 믿지 않을지 몰라도, 화성 몫의 종이에는 이 네 글자가 분명하게 써져 있었다.

 百无禁忌

 

 좋아. 아무리 엉망인 글씨라도 자신과 삼랑은 충분히 읽을 수 있는데, 그 이상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다시 보니 예전보다는 훨씬 예뻐진 것도 같고…. 아무튼 둘이 함께 쓴 것이니, 이보다 마음에 드는 글씨가 있을 리는 없다. 사련은 몸을 숙인 화성의 고개를 쓰다듬으며, 이것을 대문에 붙이기로 결심했다.

 ─그의 삼랑과 새해를 함께 보내게 된 후로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어느덧 신선의 시대는 저물고, 인계는 더 이상 이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지는 데에 바쁘다. 하루가 다르게 떠오르고, 지기를 반복했던 신들. 산 속의 낡은 도관과 삿갓을 쓴 도사들. 한 때 천하를 떨게 만들었던 귀신마저 이제는 전부 옛 이야기일 뿐이다. 그 흐름에 순응하지 못하는 자들도 많았으나, 사련은 빠르게 변화를 수긍했다. 사련은 달라지는 세상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 변하는 것이란 더없이 익숙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도 있기 마련이다. 가령 사련이 오랫동안 잊지 않고 지켜왔던 풍습 같은 것들. 그 중 하나로, 사련은 새해가 되면 항상 이런 식으로 춘련을 써 붙이곤 했다. 보제관이나 극락방, 천등관, 이 외에도 그들이 머물렀던 많은 장소에. 그 때에는 반드시 혼자가 아니고, 옆에는 화성이 함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삼랑은 어째 매년 거르지 않고 똑같은 불평을 하는 걸까? 언젠가 모정은 이 문제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전하는 그 귀왕이 어린 아이처럼 구는 걸 귀엽게 보니, 혈우탐화도 재빨리 눈치채고 그러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투에는 문장에 담긴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기색이 절절히 드러났었다. 그런 신랄함을 사련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입술 사이 꿀이라도 붙은 것처럼 조용히 넘어갈 때가 많았다. 그러면 모정은 또 다시 알 만하다는 것처럼 몇 마디를 덧붙였는데…

 “이런 걸 붙였다간 오던 복도 놀라 도망가겠습니다!”

 그래. 꼭 이런 말투로…

 “불만이 있다면 당장 꺼지는 걸 추천한다.”

 딱히 회상 속의 목소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자신을 대할 때와는 퍽 다르게 날카로운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사련은 급히 서로를 쏘아보는 화성과 모정 사이를 가로막았다. 싸움을 가로막는 일에는 사련만큼 익숙한 사람이 또 없었다. 화성은 금세 입을 다물었지만, 모정은 아직 할말이 남은 것 같다. 애초에 예전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전하는 이런 글씨를 걸어 놓는 게 두렵지도 않으십니까? 매년 볼 때마다 질리지도 않으시고요? 글씨 연습 책을 아무리 사봤자 저 놈이 변하지 않는데 다 무슨 소용인데요? 이제 그런 책시장은 전하께서 다 먹여 살리고 계실 겁니다…. 새해부터 문 앞에 저런 글씨가 걸린 걸 봐야하는 다른 사람 입장은─, 이쯤에서 사련은 슬슬 화성의 눈치를 보았다. 아무리 삼랑이라도 이런 말을 대놓고 듣는다면 상처받지 않을까? 하지만 화성은 따박따박 말을 늘어놓는 모정에게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팔짱을 낀 채로 붉은 종이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다. 사련은 그 종이를 잽싸게 집어 들고는 완강하게 말했다.

 “붙일 거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해도!”

 하! 모정은 짧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련은 급하게 글씨를 가리키며 변명하기 시작했다.

 “잘 봐…. 예전보다 훨씬 좋아진 것 같지 않아? 삼랑도 꾸준하게 좋아지고 있어….”

 춘련을 한 번 훑어보는 시선은 모정이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금방 냉정하게 고개를 저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모정의 평가는 박하고 신랄했지만 틀린 부분은 없었다. 애초에 틀린 말을 한다면 저런 단호함이 있을 수가 없다. 다만 사련은 영 억울한 기분이 되었다. 내가 볼 때는 정말로 괜찮아진 것 같았는데…. 그것은 전부 착각이었단 말인가? 그 생각에 속이 심란해지려니, 곧 커다란 손이 사련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어차피 형의 집이야. 형이 마음대로 하는 게 맞지. 안 그래?”

 “그걸 고민하는 건 아니야, 삼랑. 하지만….”

 확실히 내년에는 어리광을 덜 받아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사련은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정은 슬슬 이 의미 없는 상황을 끝내고 싶었다. 안 좋은 말을 쏟아내는 것도 장본인들이 들어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 사람들은 금방이라도 자신들만의 세계로 빠져들 것 같은데, 더 이상 말해봤자 무슨 소용이람? 결국 사련은 무슨 말을 들어도 결정을 굽힐 생각은 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럴 시간에 다음 일을 서둘러 시작하는 것이 이득이다. 모정은 거칠게 손사레를 치며 내뱉었다. 그러시면 어서 다녀오세요! 저 쪽 준비는 다 됐습니다! 그 말에 사련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삼랑, 손 닦고 부엌으로 가 있어. 나도 금방 갈게. 얼마 걸리지 않는다면 나는 형을 기다리고 있는 쪽이 좋은데. 에이, 그런 말 하지 말고. 모정은 당장이라도 눈을 까뒤집고 싶었다.

 모정과 풍신이 온 것은 달리 큰 이유는 아니고, 단순히 만두를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래, 정말로. 정말 만두 몇 개를 위해! 이는 어찌 보면 정말 시시하고 별 것 아닌 이유처럼 보이지만…사련의 음식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고작’이라는 단어는 맞지 않는 표현 같다. 풍신과 모정은 일찍이 그 말에 대해 크게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사련이 보기에 이 정도면 꽤 흔쾌히 사련을 찾아온 것이라 해도 좋겠다. 둘을 그렇게 만든 사련의 요리 실력은 글쎄…, 어떻게 보면 한 층 높은 경지에 올랐고,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 증세가 더욱 심해졌다. 낯선 이국의 재료나 조미료, 쏟아져 나오는 새로운 도구 같은 것들은 온통 사련의 실험 정신을 부추긴다. 옆에 있는 것은 그가 무엇을 만들더라도 웃으며 먹어주고 때로는 부족한 점까지 짚어주는 최고의 평가원이니, 사련을 막을 게 무엇이 있겠는가. 그들의 부엌은 이상한 냄새와 연기를 풍길 때가 많았지만, 아무도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이렇게 다른 사람을 부르지 않았나. 이 이유에 대해서 사련은 차마 직접 털어놓을 수 없었다. 최근 친절한 이웃이 정체불명의 냄새를 조리 중 사고로 생각해 소방차를 부른 일이 있던 까닭이다. 아니라고, 죄송하다고 해명을 하며 쥐구멍에 숨고 싶었던 때가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또 다시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사련은 정말로 낯을 들 수 없을 테다. 그러니까, 그 일이 모두의 기억 속에서 때까지는 자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둘에게는 이런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지 않은 채다. 아마 알게 된다면 그 일을 낸 장본인들보다도 놀라 넘어질 수 있었다….

 뭐어, 아무튼 이런 식으로라도 다 같이 모일 수 있다는 건 좋은 일 아니겠어? 사련은 최대한 이 일을 좋게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물론 사련의 자세와는 다르게, 부엌에서는 험악한 분위기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는 중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풍신과 모정이 화성의 존재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둘의 시선은 몇 백 년 전과 달라진 것 없이 영 곱지 못해, 사련이 없는 장소를 어둡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만 화성은 이 두 폐물들을 적절히 무시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 그는 깔끔한 앞치마를 맨 채로 (사련은 화성의 이 모습을 꽤 좋아했다.) 손의 물기를 닦아냈다. 눈으로는 모정과 풍신이 준비해 놓은 것들을 훑어봤다. 가득 쌓인 만두소와 밀가루 반죽들…. 짤막한 코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을 때, 풍신은 밀대로 화성을 내리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풍신에게는 아직도 흩날린 밀가루 자국들이 잔뜩 남은 채였다. 그런 모습으로 화를 내도 위엄이나 강단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고, 꼴만 더 우스워질 뿐이다. 이 사실을 기억해낼 수 있었던 것은 풍신에게 남은 마지막 이성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옷가지에 붙은 밀가루들을 털어댔다. 그렇게 생긴 연기는 고스란히 모정에게로 흘러가, 괜한 화를 돋구기 시작했다. 모정을 알고 있는 누구나가 그의 입에서 곧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이란 걸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다만 원래였다면 풍신에게 튀어나갔을 화살은 방향을 바꿔 화성 쪽으로 향했다. 귀왕 전하의 손재주가 얼마나 녹슬지 않았는지 확인할 수 있겠는데. 그가 ‘손재주’라는 단어를 언급할 때에는 숨길 수 없는 빈정거림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것은 순전히 화성의 신경줄을 건드리기 위한 말이었다. 하지만 화성의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그는 저 둘 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로 대꾸했다. 형은 내 실력이 날이 가면 갈수록 더 빛난다고 하던데. 화성의 말은 그가 굳이 이죽거리지 않더라도 원한다면 사람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고,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의 주된 피해자가 누구인지는 말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풍신은 아직 이런 것을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유해지지 못했다. 그런 날이 올 때면 아마 해는 서쪽에서 뜨고 말 것이다. 풍신이 거세게 입을 열려는 찰나, 사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래 기다렸지? 셋이 싸우고 있던 건 아니고?”

 화성은 금세 표정이 풀려선 사련에게 매달렸다.

 “형이 없으면 삼랑은 금방 괴롭힘 받는걸. 무서우니까 오랫동안 혼자 두지 말아줘.”

 이런 뻔뻔한 말을 듣고도 기가 차지 않는 사람은 사련 뿐이다. 이런 소리를 듣는 타인의 입장으로는 온몸에 오한이 몇 십 번은 들어도 마땅하다. 풍신과 모정은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몸서리를 쳤다. 저 녀석과 같은 행동을 했다는 불쾌함 보다도 눈 앞에서 오는 충격이 더 컸다. 사련은 그런 반응을 눈에 담기보다는 화성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에 바빠 어찌할 줄을 몰랐다. 사련의 입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왔다. 너희들…. 삼랑은 너희보다 어리잖아. 동생을 대하는 것처럼 해줘. 풍신은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그 놈은 절경귀왕이고, 몇 백 년이 훌쩍 지났는데 그 몇 해가 대수십니까! 모정은 결국 눈을 까뒤집고는 독기를 품은 채로 중얼거렸다. 새해 직전부터 이런 소리를 들으려니 머리가 다 아픕니다. 아무래도 그 어린 동생이랑 같이 밀가루를 만지작거리는 건 전하나 하시는 게 좋겠어요. 사련의 얼굴은 민망함으로 홧홧해졌지만, 아무래도 말을 주워담을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화성은 자신과는 전혀 관계 없는 일인 것처럼 사련의 품을 파고드는 것에 열중했다. 이런 걸 요즘 말로는 개판이라고 하는 것 같던데…. 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상황에 끼어든 것은 낭랑하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였다.

 사련은 화성을 한 쪽 팔에 매단 채로 문 쪽으로 다가갔다. 발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지만 충분히 서두르는 모습이었다. 지금을 수습할 수만 있다면 어떤 방문이라도 반갑다 못해 맨발로 반겨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문을 여니 보이는 얼굴은 인옥의 것으로, 저 어딘가 난감하고 피곤해 보이는 표정조차 낯익은 것이었다. 손에는 고급스러운 포장의 짐들이 가득했다. 아마 둘에게 건넬 설 선물인 모양인데…지금 중요한 것은 저 불편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이다. 인옥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면 대개 옆에는…그래, 인옥을 저렇게 피곤하게 만드는 원인은 저 권일진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인옥은 자신에게 혹이 딸려온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의 존재로 가장 골치가 아플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일텐데도. 성주와 태자전하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슬슬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애처롭다. 하지만 사련에게 하나이건 둘이건, 그들은 모두 반가운 손님인데다가 화성은 사련이 불평하지 않는다면 무어라 말을 얹을 마음도 없다. 그 태도가 오히려 인옥의 심정을 더욱 불편하게 부추긴다. 옆의 사제는 언제나 그렇듯, 이런 상황을 생각하기보다는 당장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하는 눈치다. 권일진은 사련과 화성의 너머로 보이는 집 안을 기웃거렸다. 고개를 쳐들고 코를 킁킁거리기도 하는 것이, 꼭 무언가 냄새를 맡는 것 같은 모양새다. 사련은 곧 부드럽게 물었다. 기영 전하는 왜 그러고 계세요? 권일진의 대답은 태평스러웠다. 완자 다 됐어? 화성을 제외한 모두가 눈을 끔벅거렸다. 인옥의 목소리는 퍽 당혹스러웠다. 일진아, 설 전에 만드는 건 만두잖아…. 권일진은 꿋꿋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전하는 다른 음식을 만든다고 하시고 완자를 가져올 때가 많잖아요. 한 달 전에도….”

 “─일진아!”

 사련은 차마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인옥은 거의 혼비백산에 가까워져, 권일진의 등을 사정 없이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현관에서 크게 울렸는데, 얼얼함을 호소하는 것은 인옥의 손이었다. 하지만 평소처럼 내심 답답하고 억울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지금은 성주의 표정이 어떨지 감히 쳐다보기 어려울 지경의 마음이 전부다. 권일진은 자신이 한 말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형, 갑자기 왜 그러세요? 그는 그 입 닥치라는 작은 신호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보다 못한 사련은 괜히 크게 헛기침했다. …오늘은 기영 전하도 같이 만들어요. 결국 얼굴을 붉힐 장본인도, 이 상황을 조금이나마 무마할 수 있는 사람도 사련이었다. 여태껏 사련의 한 팔을 붙든 채로 조용했던 화성은 상체를 숙여 사련에게 얼굴을 가까이했다. 그가 귓가에 속삭이는 어조는 담담하면서도 가벼웠다. 형이 원한다면 저 폐물들은 다 쫓아내자. 아마 부엌의 모정과 풍신까지 전부 포함한 그 말에 혹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사련은 손가락으로 화성의 미간을 밀어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고. 얌전히 있어야지. 눈치 빠른 인옥은 성주에게 연신 죄송하다 말하는 것보다는, 사제의 입을 다물게 한 채로 시선을 피하기를 택했다.

 결국 인옥과 권일진도 나란히 손을 씻고는 자리를 잡았다. 집이 언제 이렇게 만남의 한복판이 되셨냐는 모정의 이죽거림은 그대로 넘어갔다. 일일이 대꾸해주거나, 풍신과의 말다툼 사이를 가로막을 여력이 더 이상은 없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면, 내 집은 예전부터 쭉 그래왔어…. 모정도 큰 반응 없는 상대를 계속해서 찔러댈 만큼 소란을 바라는 성정은 아니었다. 곧 뾰족한 말들은 사그라들며 얌전히 만두를 빚기 시작했다. 풍신은 모정의 손이 움직이는 모습을 곁눈질했다. 본인이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냐는 둘째 치고, 확실히 모정은 이런 식으로 손을 움직이는 것이 능숙하다. 만두의 크기와 물결 무늬 주름 같은 것은 모난 곳 없이 일정했다. 그에 반해 풍신의 앞에 늘어선 것들은 빈말로도 잘 만들었다 말해줄 수가 없을 정도다. 잘하는 사람의 동작을 아무리 흉내내보려 해도 풍신의 솜씨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이대로라면 언제 모정의 비웃음이 날아올지 몰랐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눈 앞의 작업에 열중한 채고, 바늘이 꽂힌 말은 다른 쪽에서 날아왔다.

 “형. 얼마 전에 들었는데, 요즘에는 이런 걸 잘 만들면 예쁜 자식을 갖는다는 말이 있다고 해. 그렇다면 못 만들수록 그 반대라는 말이겠지?”

 화성이 말을 건 것은 사련이었지만, 그 내용이 누구를 겨낭하는 것인가는 전부가 알아들었다. 권일진을 제외한 모두의 시선이 풍신의 손 언저리에 닿았다. 머리를 스치는 생각 중에는 한 태령의 존재감이 컸다. 사련은 갑작스럽게 놀란 마음이 앞서 들고 있던 밀가루 반죽을 터트려버렸다. 모정은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트렸다. 적절하지 않다 싶었던 것인지 금방 감춰버렸으나, 이 옹기종기 앉아 있는 데에서 누가 듣지 못했겠는가. 풍신은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화성을 삿대질했다. 화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만두 모양을 사련에게 보여주었다. 이것 봐. 삼랑이 잘 만들었지. 사련은 차마 그렇다며 칭찬을 해줄 수도 없고, 그런 말은 하는 것이 아니라며 삼랑을 혼낼 수도 없었다. 그렇게 말했다간 저 말이 풍신을 뜻하는 것이라며 자신도 똑바로 인정하는 꼴이 되지 않는가? 다만 풍신은 자신을 무시하는 화성의 태도에 더 열이 받아 몇 가지 욕을 쏟아내기에 이르렀다. ─이런 식으로 설 전에 모여 둘러 앉아 있는 건 올해를 마무리 짓고 내년의 복을 빌기 위함이 아니던가. 그런데 왜 정반대의 소리가 울리게 된 걸까. 삼랑이 오늘 따라 모두에게 더욱 더 뾰족하게 구는 것 같다면 그것은 착각일까? 사련의 머리는 조금 어지러웠다. 내내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던 권일진이 입을 연 것은 그 때였다.

 “그러면 사형, 혈우탐화와 태자 전하는 예쁜 자식을 갖게 돼요?”

 그의 목소리는 우직하고 풍광 높은 소년의 것처럼 낭랑한 데다가 듣는 이의 귀에 거침 없이 들어오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권일진의 말을 듣지 못한 사람은 없다는 뜻이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전부 멍해졌다. 그러는 와중 권일진은 한 번 더 결정타를 날렸다.

 “혈우탐화가 만든 만두는 예쁘잖아요.”

 그렇게 세세한 설명을 듣고 싶지도 않았어! 인옥은 밀가루며 만두소 같은 것이 묻은 손이란 것도 잊은 채로 권일진의 뒷통수를 내리눌렀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성주! 태자 전하! 사련은 인옥이 이런 식으로 사과하지 말아주었으면 싶었다. 그가 정말로 무례를 범했다는 것처럼 어쩔 줄을 모르니, 사련의 얼굴에는 두 귀와 목덜미 같은 곳도 빼놓지 않고 전부 열이 올랐다. 아니, 아니에요…. 사과하지 말아주세요…. 화성은 담담하게, 하지만 조금 재미있다는 기색으로 대꾸했다. 나와 형은 둘만 있으면 충분해. 인옥은 이 상황을 수습하고 싶은 듯 필사적으로 권일진을 꾸짖었다. 그래, 일진아. 애초에 성주와 태자 전하는 어차피 아이를 못 가지시고, 그럴 생각도 없으시단 말야. 너 빨리 사과 드려…! 권일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웅얼거릴 수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말을 멈추지도 않았다. 하지만 절경귀왕은 뭔가 방법이 있지 않나 싶었어요. 사련은 이제 방금 전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얼굴을 비추어보지 않아도 크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선했다. 풍신은 자신이 욕을 들어 먹었단 사실도 잊고, 도저히 이 모든 말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는 표정을 했다. 모정은 더 이상 못 들어주겠다는 것처럼 주먹으로 식탁을 내리쳤다. 크게 쿵, 울려퍼지는 소리와 함께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모두가 현실로 돌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만담입니까!

 달그락거리는 식탁 위 물건들과 함께 모정의 눈이 희게 번득였다. 고개를 크게 젓는 모습은 누가 봐도 진저리를 치는 모양새였다. 한바탕 난리가 있던 식탁에는 후덥지근한 열기가 감돌았다. 흐트러진 기색 없이 하얀 낯을 유지하고 있는 건 딱 두 명이었는데, 겨우 이런 일로 호들갑을 떨 리가 없는 귀왕과 이 사태를 일으킨 부끄러움 없는 장본인이 그 둘이다. 모정은 영 못마땅한 시선으로 둘을 바라보았는데, 표독스러운 말은 사련을 향했다. 애초에 저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들으면 당신이 아니라고 대답해요! 왜 그렇게 말을 안 하고 일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거야? 사련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손부채질 했다. 이런 말을 듣는 것은 그에게도 억울한 일이었다. 나도 적지 않게 놀랐는데 어떻게 그렇게 딱 잘라 말할 수 있겠어? 아마 이 중 제일 놀란 건 나일 거야…. 이것에 대해서는 모정도, 풍신도 틀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마침내 눈동자는 느리게 굴러가 저 무치 곱슬머리에게 도착했다. 그는 혈우탐화에게 일방적인 친밀감을 가진 채로, 어떻게 하면 예쁘게 모양을 만들 수 있느냐 물어보던 참이었다. 손에는 힘을 너무 주어 터져버린 만두의 잔해가 보였다. 인옥은 10년, 아니 100년 정도는 더 늙은 기색으로 사제를 끌어당겼다. 일진아, 그만 좀 해…. 그 모습에는 누구라도 딱한 마음이 들 터였다. 이 중 제일 마음 고생, 몸 고생을 하는 사람은 아마도 그가 아닐까? 사련, 풍신, 모정, 셋의 마음이 전부 일치한 것도 오랜만의 일이었다.

 결국 어떤 사달이 나도 인옥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니, 최소한의 양심이 있는 무신들은 더 이상 옥신각신하기에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련은 한숨을 쉬며 손에 들러붙은 만두피를 떼어냈다. 모두의 정신이 떠나 있었던 사이에도 화성은 묵묵히 만두를 빚어 늘어놓고 있었다. 당연히 남은 재료는 그리 많지 않고, 얼마 안 있어 이 작업은 끝날 것 같다. 그의 삼랑은 확실히 이런 일로는 못하는 것이 드물어 이런 일에서도 재주가 빛을 발하곤 했다. 아까는 대답하지 못했지만, 그가 만들어낸 모양은 확실히 보기에 좋다. 사련의 입으로 들어갈 것이라 그런가, 아무튼 화성은 그런 문제에 대해서는 단 한 번도 허투루 해낸 적이 없었다. 결국 이렇게 얌전히 할 수 있으면서…왜 그는 오늘따라 이렇게 뾰족한 걸까? 사련은 그저 복을 기원한다면 그것을 여럿과 나누고 싶었던 마음이다. 그는 삼랑에게 무슨 일이냐며 물어보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 앞에서는 그리 하기가 힘들었다.

 인옥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만두 빚기가 전부 마무리 지어지고, 늘어놓은 것들이 정리될 즈음에 맞추어 차를 내왔다. 그가 어째서 사련과 화성의 집 부엌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미묘한 표정을 짓는 것은 풍신과 모정 뿐이었다. 사련이 찻잔을 받아 들고 창 밖을 바라보니, 시간은 어느샌가 지나 어둑하다. 그들은 이래봬도 전부 무신이니 밤길이 두렵지는 않겠지만…이렇게 늦게 붙잡아 두고 있는 것 자체가 실례가 될 것 같다. 그런 마음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런 문제를 잘 눈치채주는 것은 항상 모정 쪽이다. 모정은 사련과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홱 하고 돌렸다. 오늘 따라 헛소리를 많이 들었더니 배는 피곤합니다. 사련, 당신이 그렇게 보지 않아도 곧 갈 거니 걱정하지 마시죠! 딱히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괜찮으면 더 있다가 가도 괜찮아. 하! 그러다가 귀왕한테 찔려 죽으라고요? 저렇게까지 말한다면 괜히 붙잡을 이유도 더 없다. 모정과 인옥은 거절했고, 풍신과 권일진은 만두를 받았다. 아무리 이 둘이라도 익혀 먹는 것 정도는 할 줄 알겠지. 물론 모정은 네 둔한 손으로 전부 버리지나 말라며 풍신을 쏘아댔다. 사련은 손님들을 배웅하려 현관까지 나아갔다. 화성은 벽에 몸을 기댄 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월사, 다른 귀신들이 이상한 걸 보내지 않도록 막고, 다른 폐물들은 이제 썩 사라져라. 이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풍신과 모정은 표정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화성에게 욕만 하는 것이 전부였다. 인옥은 피곤한 기색으로 고개를 숙이고, 권일진에게도 인사를 시켰다. 때가 이렇게 되니 헤어지는 인사말도 내년의 복을 비는 것이다. 인옥과 권일진은 평범했고, 풍신의 목소리는 우렁찼다. 모정마저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을 건넸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사련은 기쁜 마음으로 인사말을 돌려주었다.

 삼랑도 참…. 인옥 전하한테 그렇게 일을 주면 어떡해? 그 분도 쉬어야 하는 거 아냐? 문이 닫히고 제일 먼저 한 말은 이런 걱정이었다. 화성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어차피 옆에 혹이 붙어 있으려고 할 게 뻔한데, 차라리 일을 줘서 그거로 핑계를 대는 게 낫지 않겠어? 인옥에게는 안쓰럽게도, 사련은 그것이 틀린 말이라 생각 들지 않았다. 넘쳐나는 일과 난감한 인간관계 중의 선택이라니. 잔인한 듯 보이지만 결국 인옥이 무엇을 선택할지 보이는 이유는 대체 뭘까. 이런 것 또한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중 하나다. 슬슬 사련은 화성의 손을 잡고, 그를 거실로 이끌었다. 부드러운 꼬여냄과 함께였다.

 “삼랑아. 이제 기분 풀고, 새해가 밝을 때까지 함께 있자. 같이 기다린다면 지루하지 않을 거야.”

 화성은 조금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 한 쪽에는 인옥이 들고 왔던 짐들이 쌓여 있었다. 개중에는 풍신과 모정이 들고 온 것도 섞여 있었고. 권일진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다. 애초에 인옥을 따라온 것 뿐이지, 그 목적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듯 한데.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가 무언가를 준비했다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 아무튼 저런 선물들을 정리하기만 해도 남은 시간은 금방 가버릴 터였다. 사련과 화성은 나란히 앉아, 그것들을 하나씩 풀어 보기로 했다. 이제는 이런 것도 대부분이 신선의 물건 아닌 인계의 것으로 채워지기 시작한지 오래다. 사련은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으나, 초반에는 이 사실이 꽤 불만인 신관들도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언제나 한 쪽이 있다면 그 반대도 있는 법이라, 변화를 받아들이다 못해 즐기기까지 하는 신관도 충분히 있을 법하다. 배명은 그런 무리들 가운데에서도 선두를 달리는 자였다. 이제 보니 이 선물들은 경로가 어찌된 것인지는 몰라도, 인옥이 전달을 부탁받은 신관의 것들 것 꽤나 있는 모양이다. 화성은 배명의 글씨가 적힌 붉은 봉투를 봤을 때, 좋아, 형. 쓸 데 없는 건 버리자. 하며 그것을 상자 째로 던져버리려 했다. 사련은 버리려면 내용물을 보고, 어떻게 버릴지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말로 그를 말렸다.

 상자의 내용물은 술로, 이런 것은 여전히 술을 마시지 않는 사련에게는 조금 난감한 선물이었다. 게다가 붉은 봉투 안 돈 대신 들은 쪽지의 내용은…정리하자면 이걸로 연인과 좋은 시간 보내라는 논지의 것 아닌가. 괜히 낯 부끄러워져 사련은 그 쪽지를 화성에게 보이지 않고 바로 접어 버렸다. 배 장군의 이런 이상한 입담도 영 바뀔 생각이 없다. 이런 것은 조금 많이 변해도 좋을텐데.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배명의 술은 곧바로 상자 속으로 돌아갔다. 초장부터 이런 것이 걸리니 다른 상자들을 열어보는 데에도 각오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런 기분이 들었던 것도 무색하게, 그 외에는 특이할 것이 없었다. 사련은 그제서야 편한 마음으로 그것들을 화성에게 보여가며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화성 또한 아까와의 날카로움과는 크게 다른 기색으로 받아주어, 하나를 뜯어볼 때마다 주거니받거니 하며 오랜 시간이 흐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둘의 주변은 어느새 포장지와 빈 상자들을 비롯한 종이 쓰레기들로 가득 찼다. 몸을 움직이면 곧바로 종이가 바스락, 구겨지는 소리가 천장을 가득 메운다.

 사련이 이것을 치워야겠다며 일어났을 때, 시야에는 잔뜩 쌓아 놓고 면포를 덮어둔 만두들이 들어왔다. 아무리 봐도 둘이서 먹기에는 많은 양이다. 모정도 가져가 줄 거라 생각하고 저렇게 만든 것이었는데…. 그가 거절하니 저만큼의 양이 남고, 그것을 전부 먹어 치울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속이 답답하다. 그런 식으로 보고 있으려니, 어느덧 사련의 머리에는 누군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방금 생각난 건데…우리 둘로는 저걸 다 먹지도 못 할 테니 말이야. 그 분한테 조금 나눠드려도 좋지 않을까?”

 아마 그는 여전히 무언가를 많이 집어 삼키는 데에 익숙할 터였다. 하지만 화성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물론 그 태도가 사련을 향하는 것은 아니라, 말 자체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이 묻어났다.

 “형이 왜 그 폐물을 신경 써 줘? 안 그래도 괜찮아. 남으면 그냥 버려도 좋지. 하지만 만약 형이 그러기 싫으면, 삼랑이 그럴 일 없도록 노력할게.”

 사련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삼랑아. 너무 싫어한다. 그래도 괜찮은 거야? 화성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지 않을 이유도 없지. 나는 형과 둘만 있으면 그걸로 충분해. 화성이 오늘 이 말을 하는 것은 이걸로 두 번째다. 사련은 이제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그가 오늘 하루 그렇게 날카로웠던 이유는, 단순히 많은 이들이 그들의 시간을 갉아먹은 까닭이었다. 사련은 버릴 것들을 차곡차곡 모으고는 재빨리 화성에게로 다가갔다.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뻗으니 기다렸다는 것처럼 상체를 숙이며 웃는다. 사련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누르며 최대한 진중히 말을 꺼냈다.

 “나는 모두가 함께 복을 빌고, 사람이 많다면 그걸로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어.”

 “저는 그러기 싫어요. 내년에는 그러지 말아요, 전하. 저들끼리 알아서 하라고요.”

 이것은 상당히 제멋대로인 말인데, 말하는 자의 태도가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걸 말하는 것 같아 뻔뻔하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화성은 직접 머리를 움직여 사련의 손에 비비적거리기까지 했다. 이 애는 어째서 날이 갈수록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는 걸까? 언젠가의 모정의 말이 해답이 되기 좋겠지만, 화성을 눈 앞에 두고 있다 보면 그것은 금방 잊혀져 버리고 만다. 영민한 머리는 이렇게 어느 한 경우에서 도저히 빛을 발하지 못할 때가 있다. 결국 사련은 그렇게 하자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약속한 거야, 형. 몇 번이고 되물을 때에도 하나하나 대답해준다. 화성은 만족스럽다는 듯이 이를 드러내며 웃고는 사련을 길고 넓다란 안락의자로 이끌었다.

 창문 밖으로는 슬슬 큰 소리와 함께 터지는 폭죽들이 보였다. 어둡기만 하던 밤하늘이 일순간 밝아지고, 다시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들어오는 빛이 서로의 얼굴을 비췄다. 이제는 정말로 새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사련은 의자에 앉은 채로 화성을 끌어 안았다. 속삭이듯 부드러운 말소리가 퍼졌다. 낮에는 다른 어떤 사람들과 같이 있어도, 결국 내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건 너야. 가장 먼저 얘기하고 싶은 것도, 첫 해를 볼 때 함께 하고 싶은 것도 삼랑, 너야. 그러니까 너무 심통내지 말아. 응? 그의 말씨에는 아주 친밀한 누군가를 달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정성을 한가득 받는 장본인은, 표정은 누가 봐도 기분이 좋은 주제에 입에서 나오는 말은 퍽 밉살맞다. 삼랑은 아직 화가 덜 풀린 것 같은데…. 사련은 짜증 하나 내지 않고 화성의 뺨을 토닥였다. 내가 어떻게 하면 될까?

 그 말과 동시에 사련의 몸은 부드럽게 넘어갔다. 등과 머리에 닿아오는 감촉은 푹신해, 어딘가 다칠 염려 같은 것도 없었다. 시야에는 흰 천장과 형광등 같은 것이 들어와 눈을 날카롭게 찔렀다. 화성은 느릿하게, 하지만 어딘가 짓궂은 기색으로 몸을 겹쳐왔다. 사련은 양손으로 화성의 어깨를 붙들었지만,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너 정말…. 화성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싫어? 이런 식의 물음은 그 존재만으로도 반칙에 가깝다. 어떻게 사련이 싫다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까. 아무래도 새해를 정각에 반길 생각은 버리는 것이 좋았다. 사련은 눈을 질끈 감은 채로 화성을 끌어안았다. 위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던 복도 놀라 도망가겠습니다! 노발대발,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착각이 일었지만, 사련은 그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다. 복이 다 별 거인가? 어찌 되었건 새로 오는 해에도 그의 삼랑은 분명히 옆에 있다. 그 오랜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것 중 가장 기쁜 일임이 분명하다. 그것이 깨지지 않았는데…. 결국 이번에도 당신과 함께 하니, 이것이 어찌 복이 아닐 수 있을까. 새해에도 가장 먼저 옆에 있는 것은 당신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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