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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이 송이송이 나리는 저녁 무렵.

 

  백의를 차려입고 삿갓을 진 도장 하나가 거리 담벼락 아래 쭈그려 앉아 봇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 마을은 크지도 작지도 않으나 산세의 중심에 자리해 오가는 사람은 많았으니, 지나가는 이들이 그 백의도인을 흘금거렸다. 비록 초라해보이는 차림에 보자기 안으로 정리하는 것은 거리에서 주워온 듯한 넝마 따위였으나, 단정하게 늘어뜨린 검은 머리칼과 미미한 미소를 머금은 그 낯은 흔히 볼 수 없는 선풍도골의 상이었다. 도장이 고생이 많네, 그러나 그렇게 스치는 사람은 많아도 오늘따라 다가와 팥죽 한 그릇이라도 권하는 이가 없었다.

  섣달 그믐이니 별 수 없지. 백의도인, 사련이 영차, 주워온 거적을 돌돌 말았다. 그래도 날이 날이다보니 고물을 내어 정리하는 집이 많아 꽤 소득이 있었다. 이미 반절 이상은 팔아 몇 푼 챙기기도 하였고. 나머지 것들은 신년에 임시 가전으로 삼거나 또 어디에 팔아 먹거리를 마련해야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디서 자면 좋을까? 며칠은 근처의 산간 동굴에 자리를 폈으나 오늘은 눈이 내려 동굴에 물이 고였을 것이다. 이 동네 길가에서 잠을 청하자니 사방이 신년으로 분주해 좋은 자리를 찾기도 어려울 듯 싶고. 한번 쭉 돌아보아야 한 자리 찾을 수 있으려나? 아니면 하룻밤 쯤은 신년으로 활기찬 거리를 구경하며 새워도 괜찮기는 할 텐데…….

  그리 상념에 빠져 짐을 정리하던 사련의 손에서 앗차, 놋쇠그릇 하나가 도르륵 굴러 빠져나갔다. 이런, 너무 정신을 팔았다. 도르르 굴러가는 그릇을 따라 아, 하고 손을 뻗었던 사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굴러가던 그릇을 누군가가 검은 신 신은 발로 탁 멈추어낸 것이다. 그 사람이 허리를 굽혀 그릇을 주워들었다.

  붉은 옷을 입은 사람이었다.

  처음 보아 든 생각은 참으로 잘 생겼다는 것이었다. 붉은 옷자락, 팔을 감싼 은이며 목에 건 장식이 하나도 과하지가 않다. 검은 머리칼을 늘어뜨리고, 또 귓가 근처에서 한줌을 땋아냈는데 그 아래에도 붉은 구슬이 매달려 요요했다. 창백한 얼굴이며 흰 살결은 마치 별 고생 없이 집안에서만 자라난 공자 같기도 했는데, 또 그 얼굴을 마주하니 그렇지가 않았다. 날렵한 턱선이며 희미하게 웃는 입매는 온화했으나 어딘가 서늘했고, 게다가 한쪽 눈은 검은 안대로 가려져 있기까지 했다. 반대편 눈은 긴 속눈썹 드리운 그늘 아래서 음영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영롱한 빛이었다. 어린가 싶으면 노련하고, 중후한가 싶으면 소년다운 청량함이 언뜻 비치는 기묘한 사람이었다. 그는 키가 아주 컸으며 허리춤에는 곡도가 하나 걸려 있었다. 사련은 문득 그가 강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리고 아주 잘 생겼고.

  다음으로 든 생각은, 이상하게 이 사람이 어딘가 익숙하다는 것이었다.

어디서 만났던 사람인가? 사련은 아, 하고 봇짐을 놓고 일어나며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눈에 띄는 사람을 만나고서 잊어버렸을 리는 없었다. 그럼 비슷한 사람이라도 본 적이 있을까? 알 수 없었다. 무어, 사련은 오랜 시간 살아오며 잊을 것도 많이 잊었고 놓을 것도 많이 놓았으니 개중에 하나일 수도 있었다. 사련이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하며 그릇을 받아들었다. 그러면 상대방 역시 빙그레 웃으며 말을 붙여오는 것이었다.

  “도장, 섣달 그믐인데 분주하십니다. 이런 날에는 좋은 사람과 차라도 한 잔 기울이셔야 하는 게 아닙니까?”

  “하하, 글쎄요. 이곳은 제게도 외지인 지라 함께 할 동무가 없습니다.”

  답하면서도 사련은 의아했다. 뜻밖에도 이 사람의 말씨에는 그 생김이나 태도가 지닌 고귀함과는 달리 어딘가 공손한 부분이 있었다. 그 굽혀오는 말투마저도 정말이지 익숙한데, 도저히 그와 헷갈릴 만한 사람마저도 기억나지 않아 사련이 한참 생각하다 얼결에 물었다.

  “그런데 공자, 혹시 우리가 어디선가 만났던가요?”

  그런데 이것은 정말, 묻고 나서 생각해보니 참 부끄러운 구석이 있는 말이었던 것이다. 마치 길거리에서 맘에 드는 사람을 만나 말이라도 붙여보기 위해 구색을 펼치는 것 같았다. 당황한 사련이 그게 아니라, 하고 부언하려 했다. 그러나 상대는 그런 사련의 당혹을 부드럽게 가로막으며 유려하게 웃었다.

  “섣달 그믐의 혼몽이지요, 도장. 오늘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니 나를 굳이 헤아리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 또한 묘한 말이었다. 만났냐는 물음에는 이리 해도 저리 해도 답변이 되지 않았다. 그를 가만히 살피던 사련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떨까? 어쨌건 그는 악의를 품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니 이래도 또 괜찮고 저래도 또 괜찮을 것이었다. 만났던 사람인데 제가 기억하지 못했다면 그는 또 그대로 다시 인연이 들 테고, 그렇지 않은데 익숙한 것이라면 그 또한 다른 인연이 닿을 것이었다.

  이리 생각하니, 참 기이하고 고상한 분이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화성이라 소개했다. 사련 역시 제 이름을 본명으로 말 해주었다. 지금은 딱히 다른 신분으로 있는 것도 아니고, 거리의 넝마주이 도장일 뿐이니 달리 위장할 것도 없었다. 화성은 사련이 봇짐을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었는데, 그는 운이 나빠 그릇 따위가 돌돌 굴러가게 하지도 않았고, 힘이 세고 손이 야무졌다. 물론 오랜 경험이 있는 사련이니 혼자도 능히 해냈을 것이지만, 또 이 공자가 저를 돕는 것을 흥겨워하는 듯 하여 그대로 두었다. 아마 어딘가의 유랑 나온 도령이 아닐까? 나이가 그래도 좀 있어 보이고 칼도 차고 있으니 경험 삼아 세상을 둘러보는 공자님일 수도 있겠다. 사련은 기꺼이 저 자신을 경험삼아 내어주곤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전했다.

  “도장은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글쎄요, 바람따라 다니는 처지이니, 오늘밤 발붙일 자리를 찾아보아야겠지요. 공자는?”

  그리 묻자, 그는 잠시 주변을 휘 둘러보았다. 섣달 그믐의 저녁,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밭을 뛰어다니며 신이 난 아이들이며 친우와 모여 한 해의 회포를 푸는 이들, 가족들과 신년 먹거리를 사러 다니는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했다. 대도시는 아니었으니 아주 정신없는 풍경은 아니었으나 화목하게 보이기에는 충분했다. 그 거리를 웃는 듯 마는 듯 하는 얼굴로 살펴본 그가 한 발 늦게 대답했다.

  “저는 돌아갈 곳이 있습니다. 하지만 눈이 와서 잠시 머물러야겠네요.”

  “바쁜 것은 아닌가요?”

  “물론 서둘러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를 기다리시는 분은 내가 눈밭을 헤맨다면 슬퍼하실 테니,   내게는 나를 돌볼 책임이 있지요.”

사련은 그가 그리 말하며 다정한 얼굴로 웃는 것을 보았다. 어쩐지 기분이 좋아져 사련도 따라 웃었다. 아마 두 사람이 서로 정답게 아끼고 사랑하는 모습을 본 탓일까? 덩달아 마음이 흐뭇해진 사련이 물었다.

  “허면 어디서 쉬다 가실 건가요? 이곳의 객잔은 하나뿐인데 아마 오늘도 영업은 할 겁니다. 도와주셨으니 제가 안내해드릴까 싶은데, 어떤지요?”

  그리하여 사련과 화성은 앞서거니 뒷서거니 하며 마을을 돌아 객잔을 찾았다. 슬슬 저녁 시간이 되어 길 가던 사람들도 식사를 하러 집으로 돌아가 마을은 다시금 고즈넉하게 물들어 있었다. 노을은 거의 졌고, 동편에서부터 몰려든 어둠이 별의 낯을 하나 둘 닦아낸다. 그 위로 다시 눈 뿌리는 구름이 이불처럼 덮여들었다. 하늘은 희고 검은 빛으로 모여들어 한바탕 푹신해진다. 새해가 되기 전에 모든 천기를 한번 닦아내려 드는 것만 같았다.

  객잔에 도착한 사련은 이런, 낭패한 얼굴을 했다. 그냥 밖에서 보기에도 불이 훤히 들어온 객잔은 사람으로 드글드글 차 있었다. 방이 있을 지도 의문이었고, 적어도 밖에서 식사할 자리는 없는 게 확실해보였다. 곁에 있는 이 사람은 한 눈에 보여도 늠름한 공자고, 마냥 맑진 않았더라도 장성해서는 분명 귀해진 사람인 것만 같았다. 그러니 누구와 합석하는 것을 달가워할 것 같지도 않은데. 사련에게 말 거는 투를 봐서는 사교적인 사람 같기야 했지마는.

  사련이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객잔 안에 들어가 점소이를 불러 물었다. 그는 허름한 차림새였지만 얼굴이 밝았고, 곁의 화성은 어디서나 눈에 띄는 붉은 차림새에 귀공자같은 분위기를 띄었기에 바쁜 점소이도 호다닥 와서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아니나다를까, 객잔의 방도 탁자도 전부 찼다는 것이 아닌가. 점소이가 정말 눈코 뜰 새 없다며 반절의 기쁨을 섞어 하소연하기를, 연말임에도 집에 들어가지 않고 허송세월하는 한량이 반절, 먼 길 떠났다가 미처 집에 도달하지 못한 행상이나 떠돌이들이 반절이라 하였다. 산을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마을이다보니 아주 크지 않음에도 이런 때에는 사람이 몰렸다. 게다가 눈이 펑펑 내리고 있기까지 하니, 발이 묶인 사람들이 전부 어디로 가겠는가? 오늘 이것저것 주워들며 그 북적임의 덕을 보기도 한 사련이 그러면 그렇지, 제 운이 좋을 리가 없다고 한탄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눈은 활기찬 사람들의 모양을 정어린 투로 스쳤다. 세상이 평온하니 다들 별 걱정 없이 지내는 것이다. 만일 전란이라도 들었다면 눈이 오건 말건 발을 재촉해 집에 돌아가려고 들었겠지. 그런 의미에서는 기쁜 일이기는 하다만…….

  “어쩌면 좋지요, 공자. 내 불운이 옮겨갔나봅니다.”

  곁에서 그저 구경하듯 서 있던 화성이 빙긋 웃었다. 그는 일이 이렇게 되었음에도 영광입니다, 도장. 같은 말을 했다. 참 선량한 사람인걸. 사련이 그런 이가 길가에서 곤란하게 되었음이 안타까웠다. 그런 사련을 찬찬히 지켜보던 화성이 점소이에게 물었다.

  “그러면 음식을 주문해 가져갈 수는 있나?”

  점소이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섣달 그믐에 풍족해진 인심 탓인지 반짝이는 은전 탓인지 화성이 꽤 가짓수가 많은 음식을 주문했음에도 주방에서는 싫은 소리 한 번 없었다. 동전 몇 개로 점소이에게 사례까지 마친 화성이 사련을 돌아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오는 길에 길가에 정자가 있는 걸 보았답니다, 도장. 일이 이렇게 되었고 도장도 갈 곳이 없다 하였으니 그곳에서 눈이 그칠 때까지 잠시 함께 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 그것도 나쁘지 않겠네요. 마을 입구 쪽에 있는 정자라면 확실히 눈을 피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일홍일백의 일행은 잠시 기다려서 음식을 받아들고는 또 앞서거니 뒷서거니 마을 입구의 정자로 향했다. 이곳은 여름이면 노인들이 볕을 피하는 자리이며 어린아이들이 올라타 수박을 먹는 자리이기도 했다. 대부분 놀다 가는 사람 한 둘은 있었기에 사련도 피했던 자리이나 오늘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사 신년이니. 사련이 그나마 잘 되었다 안도하며 봇짐을 뒤져 거적을 끌어냈다. 최대한 깨끗한 면을 탈탈 털어 바닥에 깔아두니 흰 돌을 타고 오르는 한기는 조금이나마 가시는 것이었다. 화성은 싫은 기색도 없이 그 위에 답싹 앉아선 들고 온 음식을 펼쳐두었다. 사련은 당연히 제 돈 주고 산 것이 아니기에 함께 먹을 생각은 없었는데, 화성이 당연하다는 듯 젓가락을 두 개 놓자 조금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저는 괜찮아요. 한 푼 내지도 않았는데 염치가 없어요.”

  “그러지 말고 같이 들지요, 도장. 마주앉아 나만 먹는 것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지만…….”

  “곧 신년이니, 도장에게 베푸는 것으로 내가 복 받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까지 말 하니 사련도 거부할 말이 없었다. 화성이 찬합을 펼치고 잔을 내어 사련의 앞에 뜨끈한 차를 부어 주었다. 신기하게도 이 차는 눈밭을 가로질러 왔음에도 아직 온기가 가시지 않아 썩 마실 만 했다. 그렇게 한입씩 먹고 마시니 화성의 외눈에 온기가 찼다. 참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다. 사련이 홀로 생각하며 그를 말똥히 바라보았다. 그는 사람을 볼 때 매사 다정하고 상냥한 모양인지, 오늘 처음 만난 사련을 앞에 두고도 한 번을 무례하지 않았고 항상 공손하며 행동거지가 차근차근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짓궂은 웃음을 띄고, 또 한편으로는 그리운 듯 느긋한 눈을 하였으며, 고개를 돌려 눈 내리는 풍경을 바라볼 때면 외로워보이기도 했다. 사련은 그가 그런 낯을 하는 영문을 알지 못했으나 낯선 그에게 섣부르지 못하고 달리 물었다. 그들은 이미 친근하게 구는 화성이 제안하여 말도 놓은 채였다.

  “눈이 그치면, 산을 넘어서 가는 거야?”

  “아직 길은 찾는 중이야.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은데 길이 조금 머네. 하지만 내 귀한 분이 나를 기다려줄 것을 아니 괜찮아.”

  사련은 문득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자신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음을 확신하는 기쁨이란 어떤 것일까? 또 그런 사람을 기다리는 분은 얼마나 안타깝고 행복할까? 사련은 이런 것으로 부러워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휩쓸리는 마음을 거두고 단지 이를 잠시 구경할 수 있음에 기뻐하기로 하였다. 조심스레 만두 하나를 집어든 사련이 그를 한 입 물고 삼켰다. 추운 날, 눈 내리는 정자에 앉아 따뜻한 음식을 먹자니 썩 운치가 있는 듯도 했다.

  그렇게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며 식사를 마치자 밤은 꽤나 깊어져 있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담? 높이 뜬 별을 헤아리며 사련이 놀라 생각했다. 하늘에 드리웠던 구름은 어느샌가 사라졌고 눈도 그쳤다. 바닥에 쌓인 흰 빛 융단이 퍽 장관을 이루었다. 별들은 그 흰 바닥에 비추어 지고 싶다는 양 반짝거리며 제 빛을 쏟아내고 있었다. 하늘을 한바탕 씻어낸 먹구름은 그만큼 맑은 별빛을 세상에 돌려주었다.

  “눈이 그쳤네.”

  “그렇네.”

  사련은 본능적으로 이 사람이 곧 떠날 것임을 알고 문득 아쉬워졌다. 그는 참으로 다정하고 친절한 데다 아는 것도 많아 이야기하며 지루할 틈이 없었다. 낯선 지방에서 지기를 만난 듯, 그리고 그와 또 다시 헤어져야 하는 듯 아쉬운 맘이었다.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차렸는지, 화성이 하하, 웃었다.

  “오늘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인연이니 나를 굳이 헤아리려 들 필요는 없습니다. 기억 나?”

  “아까 화 공자가 그랬잖아.”

  “응. 만일 우리가 운명이라면 언젠가 다시 만날 테니 아쉬워 마요, 도장.”

  그의 말씨는, 어딘가 야릇한 기색이 있어 눈을 둥그렇게 뜨고 듣던 사련이 무심코 뺨을 붉혔다. 화성은 그가 재미있다는 양 웃음을 터뜨렸으니 사련의 볼에 든 불은 나갈 생각을 못했다. 부채질하며 겨우 낯을 수습한 사련이 멋쩍게 답했다.

  “공자는 참으로 상냥하고 다정해 내가 아쉬웠어. 네 말대로 만일 우리가 또 만난다면 그때는 내가 뭐라도 대접해주도록 할게.”

  “도장이 그래 준다면, 나는 뭐든 기쁘게 먹을 거야.”

  화성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련은 오늘 밤 여기서 쉬어 갈 예정이었기에 그를 따라 정자 문간까지만 갔다. 아쉬운 마음을 거둬들이고 나니 오늘 한 밤의 인연이 기뻤다. 도통 운이라곤 없는 사련이었지만 한 해의 마지막에 이런 사람을 만났으니, 내년에는 어쩌면 기쁜 일이 있을까 싶다.

  “밤길을 떠나도 괜찮겠어? 조심해.”

  “내가 걱정된다면 기원을 좀 해주는 건 어때? 곧 신년이니.”

  옷자락을 정리하며 나갈 채비를 하던 화성이 정자 다리 앞에서 몸을 돌려 웃었다. 그는 키가 훤칠해 사련이 높이 올려다보아야 했는데, 그럼에도 낯에 그늘이 없어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작은 장난꾸러기가 저를 싱글거리며 내려다보고 있는 기분이라, 음, 하고 고민하던 사련이 한 차례 웃었다. 그가 두 손을 모으며 고했다.

  “그러면, 공자를 기다리는 분을 무사히 만나고, 함께 정겨우며 영영 해로하기를 기원할게.”

  “하하, 도장이 그렇게 말 해주니 이제 정말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화성이, 잠시 사련을 바라보다가, 그의 손에 무언가를 쥐여주었다. 사련이 고개를 내려 보니 그것은 정교하게 만들어진 나뭇대에 종이를 덧댄 작은 등불이었다. 안에 들어있는 기름등이 아른거리며 어둑해진 사위를 밝혔다. 이게 갑자기 어디서 나왔지? 사련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한 걸음만에 성큼 다가온 그가 속삭였다.

  “당신께 가는 길이란 어디여도 지극한 영광이에요.”

  환한 밤, 별이 쏟아지는 신년.

  “당신이 내 복이시니, 운명을 바꾸어서라도 돌아오겠습니다.”

저를 믿으세요. 지척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그리움에 가득 차서 잔잔히 흘렀다. 숨이 귓가에 닿자마자 온몸이 녹아 쓰러질 것 같은 애달픔 음성이었다. 잠시 멍해졌던 사련이 눈을 감았다가 뜨자, 그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사련이 홀로 남은 정자에 서서 눈을 깜빡였다. 오로지 나비가 조각된 등불만이 영롱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그새 이미 멀리 간 걸까? 아니면 제가 눈치 채지 못한 귀신이나 신령이었던 걸까? 사련은 한참이나 그 자리에 서서 등불을 매만졌다. 연원을 알지 못하는 마음이 솟아 속이 술렁인다. 만나보지 못한 이를 향한 그리움처럼, 어렴풋하고 기이하다. 오래도록 서성이던 사련이 천천히 정자 안으로 돌아와 앉았다. 화성은 남은 음식 중 들고 가기 편한 것들만 모아가고, 나머지는 사련이 먹기를 권하며 남겨두었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찻잔의 온기도 여전했다. 잠시 그를 내려다보며 생각하던 사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누구면 어떻고 제게 어쩌면 또 어떨까. 등불을 받아 섣달 그믐을 기쁘게 밝힐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일이겠거니 했다. 그가 남겨주고 간 흰 등불은 참으로 따스하고 어여뻐, 사련의 손과 맘을 한껏 녹여냈다. 안에 기름이 넉넉히 들었는지 심지는 오래도록 타올랐다. 따뜻하다. 사련이 눈을 감았다.

그는 바라던 사람에게 돌아갔을까?

 

 

 

 

 

 

 

 

 

 

 

 

 

2

 

 

 

한낮, 그러나 눈 내리는 하늘이 구름을 잔뜩 드리워 사위는 환했으나 맑기보단 흰 날이었다.

눈발이 펑펑 흩어지는 가운데 동네에는 아이들만이 잔뜩 신이 났다. 섣달 그믐에 무슨 눈이 이리 많이도 내린담, 어른들은 우산을 쓰거나 삿갓으로 머리를 가린 채 종종걸음으로 오갔다. 휘도는 눈송이가 참 굵다. 동네 시장의 상인들은 내놓은 것들이 젖을까 싶어 처마를 펴고 나뭇살을 덮어 상품을 감추었다. 화로에 장작을 넣어 육전이며 산적 따위가 어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그 훈기로는 이 눈을 다 녹일 수는 없으니, 담벼락이며 처마마다 잠시 눈 피하는 사람들이 가득이었다.

개중에 어느 문 닫은 가게 처마 아래에도 눈을 피하는 이가 하나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내려묶고, 푸른 도복을 단정히 입고는 두터운 겉옷으로 추위를 막아낸 모양새가 청렴결백하다. 십대 후반 즈음 되어보이는 어린 청년은 손에 무언가 바리바리 싸들고 서 있었다. 근처에 있는 무문의 수련생인 듯 했다. 그는 역시 이 눈에 길이 막힌 것인지 아무래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눈 내리기를 멈출 생각을 않는다.

정말 어쩐담. 신년이 다가와 사제들에게 줄 선물을 사러 나온 인옥은 난처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그저 조금 흩날리는 눈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지날수록 거세져 이제는 숫제 시야를 다 가리고 있었다. 처마 밑을 서성이던 그는 이대로 여기서 못 나가게 되는 건 아닐까 고민했다. 우산이라도 하나 가지고 올 것을. 금방 들어갈 거라고 여겨 날씨를 만만히 본 것이 죄였다.

선물을 다 산 거라면 그냥 눈덩이가 되는 걸 감수하고 돌아갈 텐데, 문제는 아직 막내사제의 선물을 사지 못했다는 것에 있었다. 장성해서 말이라도 알아듣는 아이라면 내일 사 주마, 하고 달랠 수라도 있지. 그 애가 이런 양해를 알아들을까? 잠시 가늠하던 인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안 추워요?”

그렇게 상념에 빠져있는 사이, 불쑥 말 걸어오는 목소리에 인옥이 화들짝 놀라 곁을 돌아보았다. 대체 언제 온 건지, 처마 아래에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그는 검은 무복에 두터운 솜옷을 걸친 남자였다. 키도 훤칠하고 몸도 단단해 뵈는 것이 어딘가의 고수 같았는데, 소년같은 어린 티가 나면서도 이상하게 나이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인옥은 이 사람이 저보다 나이가 많다는 것을 직감했으나 확신하기는 어려웠다. 그의 올려묶은 머리칼은 약간 밤색에 가까운 흑발로, 곱슬기가 짙어 나풀거렸다. 두 눈은 가라앉아 묵묵했으며 표정은 별로 없었다. 놀라 돌아봤던 인옥은 이 사람의 내력을 짐작할 수가 없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직 자라는 중인 인옥은 이 사람보다 키가 약간 작았기에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어라, 어딘가 익숙한 형상인데. 마치 근처에 그와 닮은 사람을 두고서 잊어버린 듯한 기분이었다. 이게 대체 무엇이람? 눈을 깜빡이던 인옥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다지, 괜찮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의 시선이 인옥이 들고 있는 짐으로 향했다. 보따리에 넣고 싸매 온 것들은 작은 장난감부터 서책이나 그림 따위로 잡다했다. 인옥은 그가 무엇을 묻는지 알 것 같아, 물음이 없었음에도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눈이 많이 오죠. 사제들 선물을 덜 샀는데 돌아가야 할까 고민입니다.”

아닌게 아니라,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도 여전히 눈발은 거세지기만 했다. 이러다가 눈이 한참 쌓이면 돌아가지도 못하는 게 아닐까? 난감히 고민하는 인옥의 시선이 원망스러운 하늘로 향했을 때, 곁에 있던 남자가 팡, 하고 우산을 폈다. 그것은 마치 상이라도 당한 것처럼 새까만 우산이었다. 그가 우산대를 붙들고 인옥의 앞에 받쳐들며 그를 바라보았다. 인옥은 당황스러운 마음에 망설였다. 우산이 있으면서 처마 밑에는 왜 들어왔지? 그는 딱히 무뚝뚝하거나 냉랭해보이는 인상은 결코 아니었지만 오관에 표정이 없었다. 그냥 멀뚱한 것 같기도 하고, 덤덤한 것 같기도 했으나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게 살펴보고 있자니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보면서 어쩐지 순진한 인상을 받은 인옥이 민망하게 대답했다.

“저, 이러실 필요는 없는데…….”

“이건 그저 혼몽이에요. 하지만 저는 선물 받고 싶으니까, 가요.”

이건 또 생뚱맞은 대답이다. 잠시 이게 무슨 말인가 고민하던 인옥은, 그라면 선물이 받고 싶었을 테니 당신 사제들에게도 선물을 사주자는 식으로 이해했다. 이 남자는 말수가 적고 엉뚱한 사람처럼 보였는데, 이것은 사람 상대가 서투른 무인의 특징 같기도 해서 한편으론 익숙했다. 인옥과 함께 수련하는 사제들이나 주변의 어른들 중에도 가끔 이렇게 흰 종잇장 같은 사람이 있었다. 이 자도 마찬가지로, 어딘가 뜬금없고 엉뚱한 듯 하면서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 것이 또 재미있었다. 제가 곤란해보이니 도와주려는 건가. 인옥이 그렇다면, 하고 고개를 숙여 그의 우산 아래로 들어왔다. 키 차이가 좀 나는 그는 우산을 기울여 인옥과 그의 짐이 눈을 맞지 않도록 배려했다. 확실히 악인은 아닌 모양이지. 인옥이 조금 가늠하고 조금 안심하며 물었다.

“섣달 그믐인데 어딘가 가시고 계셨던 게 아닙니까?”

“누굴 찾고 있었어요.”

“누구를요?”

“사형.”

아, 인옥이 고개를 주억였다. 어째 안색도 나쁘고 축 쳐진 강아지같더라니. 사형이라는 사람이 어디로 없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이 사람이 사제들에게 선물을 사준다는 제게 이입한 것도 이해가 되었다. 인옥은 좀 걱정스러운 마음이 되어 물었다.

“사형이 어디로 가셨는데요?”

그러면 그는 인옥을 돌아보더니 침묵했다. 그는 사람을 눈새로 흘긋 보지 않았고 고개를 온전히 돌려서야 이쪽을 보았다. 둥그런 두 눈은 언제나 상대를 똑바로 바라보며 직시하는 올곧은 면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두 눈으로는 그렇게 인옥을 직시하면서도 입을 열지는 않았다. 인옥은 잠시 망설였다. 일단 찾는다 하니 산 사람일 텐데, 혹시 사이가 나쁘기라도 한 걸까? 답하지 않는 사람을 앞에 두는 것은 곤란한 일이었고, 인옥이 제가 실례라도 했을까 싶어 애써 웃으며 무마했다.

“대뜸 개인 사정을 물었네요. 실례했습니다. 저는 인옥이라 하는데, 공자는?”

“……기영.”

망설이던 남자가 우물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기영이라 해요. 인옥은 그가 스스로를 칭하는 호칭에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딱히 거짓말은 아닌 것 같은데 묘하네. 그러나 거짓이라 해도 캐물을 일은 없었기에 인옥은 어른스럽게 끄덕였다. 우산 감사합니다, 기영. 남자는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마주 끄덕이기만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인데 꾹 참는 것 같았다. 인옥은 기이하게도, 그가 할 말을 참는 것이 너무 어색하게 느껴져 멀뚱히 그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기영은 왜요, 하고 눈으로 묻듯이 받아쳤다. 인옥이 고개를 젓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눈이 펄펄 내리는 거리를 걸어 장난감들을 내 놓고 파는 가게의 앞에 섰다. 처마 아래의 좌판 위에는 나무로 만든 인형이나 나비, 팽이나 말 따위가 놓여 있었다. 아이들의 장난감을 파는 곳인데, 신년이다보니 어린아이에게 사주려는 부모나 형제가 그들 말고도 두엇이 더 있었다. 기영이 받쳐주는 우산 아래서 인옥은 고민에 빠졌다.

“막내사제는 장난감을 사주면 가지고 놀 지를 모르겠네. 그 애는 이런 것보다 검을 더 좋아해서……. 팽이같은 건 괜찮은가?”

검을 사 주면 간단할 테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지난 신년에는 장난감 칼을 사 주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외의 것을 찾을 수 없어서 올해 생일에도 또 장난감 칼을 사 주고 만 것이다. 인옥이라고 해도 같은 선물을 세 번이나 줄 수는 없었다. 그건 너무 무신경해 보이잖아, 아진의 손도 두 개 뿐이고. 하나 더 주었다간 입에 물고 싸우려 할지도. 어린 사제는 그냥 좋아라 할지도 몰랐지만 인옥은 그런 걸 굳이굳이 또 신경쓰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속으로는 아진 역시 신경 쓸 수도 있었다. 어린애라고 해서 속이 얕을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므로.

그런 그를 곁에서 구경하는 기영은 나무 나비를 하나 들고 팔랑거리고 있었다. 나뭇대를 쥐고 흔들 때마다 매달린 나비가 더듬이를 나풀거렸다. 한참 고민하는 인옥을 기웃거리던 기영이 툭 말을 붙였다.

“뭘 줘도 좋아할 거예요.”

인옥이 그를 돌아보았다.

“그야 싫어하진 않겠지만……. 제거는요, 하고 달려오는 아이인데 실망시킬까봐요.”

“무얼 받았냐보다 사형의 주었다는 게 좋아요.”

“기영은 그랬습니까?”

“……그랬어요.”

이 사람은 아무래도, 그리움에 젖어 제 사제 이야기에 자기 사형 이야기를 함께 떠올리는 것 같았다. 문득 연민이 들어 인옥은 그에게 맞춰주듯 고개를 주억였다. 이렇게 눈이 내리는 날, 섣달 그믐임에도 거리를 떠도는구나.

얼마나 그리운 사람이기에?

게다가 이렇게 큰 사람이 풀 죽은 강아지마냥 입을 꾹 닫고 낯에 그늘이 진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어째선지, 이렇게 흐린 표정을 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째서일까. 그가 제 막내사제와 어딘가 닮은 탓일까?

이렇게 생각이 스쳐지나가고 나서야 인옥이 고개를 들어 다시금 그를 들여다보았다. 스치고 나서야 골똘히 보니, 확실히 그런 듯도 싶었다. 그는 몸이 탄탄하고 턱선이 뚜렷한 것이 분명 장성한 청년이었지만, 여전히 소년미가 남은 눈가나 볼을 보고 있자면 훨씬 어리게도 보였다. 그 말똥한 표정이나 눈매가 막내사제를 닮은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인옥 저도 그를 대뜸 믿고 우산 아래로 들어오게 된 걸까? 인옥이 스스로에게 납득하며 상인에게 돈을 주어 팽이를 샀다.

“사제가 정말 좋아할지는 모르겠지만…….”

뭘 주든 신이 나서 감사합니다, 하고 뛰어다니긴 했지만 인옥은 그가 정말로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지 들여다볼 시간이 많지 않았다. 정말로 좋아할까? 어린 사제는 큰 사형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좋다고 따라와선 말똥말똥 바라보곤 했지마는. 인옥은 그 눈빛에 자신이 부응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긋나면 어쩐다 전전긍긍하게 되기도 하였고. 밤마다 창가에 다가와 사형, 부르는 목소리가 들릴 때면 또 무슨 사고를 쳤나 걱정부터 들기도 하고…….

어린 사제는 제가 마치 유일한 하나인 것처럼 바라보았지만, 인옥은 그 하나만을 돌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사람에게 태양은 응당 유일할 것이나 해의 입장에서도 그럴까, 옥토는 넓고 민중은 수도 없는데. 신경 쓸 거리는 한도 끝도 없고, 그 자신도 수련하고 돌보아야 하니 저만을 보는 그에게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인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리 복잡히 생각하여도 그가 막내 사제를 아끼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 좋아하며 다가와 총총 웃는데 싫을 리가 있나. 게다가 그 손으로 직접 거두어 키운 아이인걸. 그러니 어쨌건, 인옥의 마음으로는 그가 장난감을 좋아해주기를 바랐다. 정말로 뭐든 좋다고 할지 그 마음을 읽을 수는 없어도.

그런 인옥을, 반 걸음 뒤에서 기영이 가만 바라보고 있었다. 낯에는 그늘이 질 듯 말 듯 했고 두 눈은 깊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됐다. 이제 돌아갈까요?”

인옥이 그런 그의 기색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한 치 앞에서 어긋나고, 모든 오해와 모든 얽매임은 그 한 치에서 생겨난다. 그들은 언제나 온전히 꼭 맞을 수 있는 조각은 아니었다. 기영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우산을 단단히 받쳐 인옥의 머리 위를 지켜냈다. 인옥은 도망치지도 멀어지지도 않은 채 그의 우산 아래 함께 걸었다. 신년의 기적이라도 되는 모양으로.

모양 비슷한 발자국이 흰 눈 위를 어지럽힌다. 소복소복 쌓인 눈길을 따라 걸어오니 벌써 인옥의 집 담벼락이 눈앞에 있었다. 눈이 와도 무예를 수련하는 어느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이미 정겹고 익숙했다. 그 기와며 담장의 모양, 현판에 걸린 소담한 글씨마저도 그렇다. 잠시 담장 위에 쌓인 눈을 올려다보았던 인옥이 뒷문 앞에 멈춰 기영을 돌아보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를 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기영이 대뜸 무언가를 건네었다. 얼결에 받아든 인옥이 어리둥절하며 그것을 내려다보았다. 태양이 조각된 나뭇대에 황색 천을 덧대어 만든 노란 등불이었다. 언제 산 거지? 제가 도움을 받아놓고 이런 걸 받게 된 인옥이 당황하며 그를 도로 밀어주려 했다.

“찾는 분도 있으시다면서 들고 가질 않고요?”

“나는 됐어요. 밝으면 더 숨어버릴 지도 몰라요.”

“섣달 그믐인데 등을 밝혀야죠.”

“사형이 등을 켜 주면 나는 그걸로 됐어요.”

인옥이 눈을 크게 떴다. 제게 사형이라니?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기영이 문득 느슨하게 웃었다. 무뚝뚝했던 입매가 풀리니 훨씬 온순한 낯이었다. 어딘가 아득했다. 눈발 몰아치는 하늘 아래서, 오롯 그만 뚝 떨어져나온 것 같았다. 태양같은 눈에 인옥을 가두며 기영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가 답하지 못하더라도 신경쓰지 않는 듯한, 고요한 음색이었다.

“내게 준 모든 것들, 사형은 주지 않으려 했을지 몰라도 나는 받았어요.”

선물 하나에서부터 은혜와 복까지도, 이 날 맞이하는 신년마저도.

“그러니 기다려요, 사형.”

꼭 찾을 테니까. 스며든 목소리는 열기가 가득해 이 아래 눈을 전부 녹여버릴 듯 했다. 인옥이 멍하니 그를 올려보았다. 말문이 턱 막히고, 휘몰아친 눈발이 침묵 사이를 날아다닌다. 인옥은 그의 사형이 누구인지, 그가 누굴 찾고 있었는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사람이 대답해주지 않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나아가지도 못하고, 들이지도 못한 채로 시간이 한 틈 지나갈 적에,

“사형!”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우당탕 달려나오는 발걸음에 놀란 인옥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마당 안쪽에서 눈밭을 다섯 번은 구른 몰골로 뛰어나오는 아이는 그의 어린 사제, 권일진이었다. 일진아, 부른 인옥이 아차하며 다시 앞을 보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이었다. 인옥의 손에 노란 등불 하나만 쥐어주고. 거리를 살펴도 이미 아무도 없다. 눈밭에 남은 발걸음은 둘인데, 그새 또 쌓이는 것이 금방 그 위를 덮는다. 잠시 찾으러 가야 할까, 생각하던 인옥이 고개를 저었다. 그토록 그리워하였으니, 제게 잠시 머물렀던 눈을 거두고 제 사형을 찾으러 간 걸 지도 모르지.

천천히 문을 닫고 들어오며, 인옥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어.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도도도 달려온 권일진이 그의 곁에 찰딱 붙어 섰다. 똘망한 얼굴은 별 표정이 없어도 귀엽긴 했다. 인옥이 반쯤 웃으며 그 곱슬거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겼다. 눈이 다 묻었네. 대체 어디서 구른 거야?

“선물 사 왔어요, 사형?”

“그래, 하지만 이따가 다 있을 때 줄 거야. 기다릴 수 있지?”

“있어요.”

꿋꿋한 얼굴을 하는 작은 소년을 보며 인옥이 웃었다. 손에 쥔 등불은 눈이 내리는 와중에도 밝게 타오르고 있었고, 정말 섣달 그믐 밤새 켜 두어도 사그라들지 않을 것만 같다. 도장에 불을 켜 두면 섣달이고 뭐고 드러누워 자버릴 권일진의 복도 조금 받아낼 수는 있겠지. 인옥이 상념을 접으며 제 방으로 향했다. 권일진은 그의 방까지 따라올 셈인지 손발을 탈탈 털어 눈조각을 떨쳐내며 걸었다. 그 모습이 어린 강아지같아 인옥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아진 마음에 들 지는 모르겠네. 너무 기대하진 마.”

“나는 사형이 주는 거면 다 좋은데요?”

권일진이 그리 대답하며 고개를 들었다. 이렇게 보니 그 사람과 정말 닮았구나. 인옥이 제 방에 들어서기 전에 등불을 내려두곤, 작은 사제의 어깨며 머리칼을 털어주었다. 눈송이가 탈탈 털려나오며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져 녹았다. 인옥이 소매로 권일진의 뺨을 닦아주며 빙긋 웃자 어린 사제도 헤 따라 웃는다. 막내 사제와 방으로 들어서기 전, 인옥이 마지막으로 눈 내리는 바깥을 한번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제 사형을 찾고 있을까?

 

3

 

누각마다 환히 밝힌 등불의 빛무리가 하늘에서 쏟아지는 눈송이와 만나 휘황한 밤.

큰 도시의 섣달 그믐 밤은 날이 가는 줄도 모르고 휘청거리며 술잔을 기울이는 환몽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데도 뛰어다니며 등불을 쥐는 아이들, 묵은 해를 전부 잊어버릴 마냥 술을 들이키는 어른들. 집이 있건 없건, 복이 있건 없건 오늘 밤만은 전부 태워 천지도 기쁘게 하고 술집 주인도 기쁘게 할 사람들이 한가득 모여 있는 소란한 거리가 있었다.

그 거리를 한들한들 걸어가는 이가 있었는데, 이곳에서 그를 모르는 이는 적다. 녹색 술이 한들한들 흩날리는 백의의 청년, 부채를 쥐고 살랑거리며 술잔을 쥐고 세월을 보내는 도인. 맑고도 휘황하고, 바람같으며 봄날같다. 검은 머리칼 아래의 두 눈동자가 영롱한 빛을 내었다. 여기저기서 새해 인사를 듣는 청년의 손에는, 오늘은 부채 대신 눈발을 막아줄 흰 우산 하나가 쥐여져 있었다. 이미 반쯤 술을 마셨는지 발간 볼로 이곳저곳 돌아보던 그의 눈이 어느 한 곳에 멈추었다.

“안녕, 형제님. 섣달 그믐에 왜 혼자 떠돌고 있어요?”

불쑥 고개를 내미는 청년의 목소리에, 어느 객잔의 정원석에 걸터앉아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는 백의의 청년과는 달리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옷을 걸치고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온몸이 새까맸다. 하늘에서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는 게 아니었다면 그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차리지 못했을 것이다. 무얼 피해 숨어 있기라도 한 걸까? 청년, 사청현이 술기운에 달아오른 뺨을 하곤 헤실헤실 웃었다.

“이렇게 눈이 펑펑 오는데. 당신도 명절을 같이 치를 사람이 없는 모양이죠?”

그리 말 하며 사청현이 사내에게 우산을 받쳐주었다. 당연히 이 사람이 어디의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거리의 사람이라면 친분을 나눌 만 하다고 여기는 사청현이기에 문제란 없었다. 게다가 밤이라곤 해도 이렇게 백주대낮처럼 밝으니!악인이라 해도 악의를 펼칠 수 없는 밤이요, 귀신이라 해도 날뛸 수 없는 그믐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풍류를 아는 사람이라면 섣달 그믐에 이리 처량히 앉아있는 사람을 지나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그 자는 사청현과 생각이 달랐는지, 그가 다가오자 이쪽을 흘긋 보더니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청현이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허리에 손을 얹었다.

“어어, 사람이 말을 걸었는데 한숨부터 쉬시다니?”

“혼몽에 취해 정신이 없군. 쓸데없이 말을 걸어.”

“심심해서 그렇다 치지요, 공자.”

사청현이 싱글싱글 웃어젖히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의 머리칼은 본래 약간 밝은 흑색이었기에 여기저기서 밝힌 등불에 의해 좀 더 환한 빛이 되어 있었다. 부드럽게 굽이치는 머리칼과 귓가에서 찰랑이는 귀걸이, 옥과 같은 얼굴은 의젓하며 또한 청량하다. 어느 모로 보다 해맑고 어엿한 상이라 그를 지켜보는 사내의 눈가가 좁혀들었다. 그는 무언가 참는 것처럼 미간을 좁히다가 또 그만두었다. 거 이상한 형씨네. 사청현이 빙긋 웃으며 그의 까만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우리 형은 바빠요. 그래도 자정 무렵에는 와줄 테지. 그런데 당신은 이렇게 아무도 반겨주지 않을 거라는 얼굴로 앉아 있으니 그냥 지나칠 수야 있겠어요?”

“오지랖이다.”

“그러지 말고. 나는 지금 형이랑 먹을 것들을 사러 갈 건데, 할 일 없으면 우산 받쳐 줄 테니 같이 갈래요?”

이 자는 의뭉스러운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사청현은 마냥 기분이 좋아 웃었다. 눈도 오고, 새해도 오고. 그간 괴로웠던 일들도 지나가는 섣달 그믐인데 어찌 기쁘지 않으랴. 그의 형은 비승하여 수사대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으니 형이 함께 이 날을 보내지 못하는 것도 가슴아프진 않았다. 저 윗전의 선계에도 여러 모로 바쁜 일이 있을 테니까. 사청현이 기분 좋게 웃으며 응? 응? 하고 남자를 채근했다. 그는 대뜸 다가와 친한 척 하는 청현이 어이가 없었는지 미간을 좁혔다. 사청현은 거절당하려나, 하며 우산을 빙글빙글 돌렸다. 사방으로 눈송이가 떨쳐나가는 모양도 장관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숨 한 번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나 사청현의 곁에 섰다.

“어디로 가지?”

우와, 이 몸의 사교력이란. 사청현이 뿌듯한 얼굴로 웃었다. 어쩐지 좋은 기분이 들어 이 사람과 괜히 가까이 서고 싶었다. 이건 술이 부른 만용인가? 세상 모든 사람이 친구로 보이는 혼약이라도 먹었단 말인가? 지척에서 보니 이 사람은 그보다 키가 컸다. 청현이 그리 작은 키가 아니었음에도 그랬다. 오, 몸도 단단해보이고. 술김을 빌려 그의 손등을 콕콕 찌르다가 손이 잡힌 사청현이 방긋 웃었다. 그는 뭐가 마음에 안 드는지 사청현의 손목을 쥐고 인상을 잔뜩 쓰다가 또 놓는 것이다.

“그나저나 공자는 이름이 뭐예요? 왜 길가에 그러고 있었담?”

“순서가 틀리지 않았나?”

“친해져야 통성명을 하지. 나는 사청현이라고 해요. 형씨는요?”

“알 것 없어.”

그는 내도록 퉁명스러웠지만 우산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사청현은 어쩐지 이 사람에게서 깊은 친근감을 느끼고 빙긋 웃었다. 어쩌면 제게, 자신을 내치는 사람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반골 기질이 있는 걸 수도 있었다. 혹은 그냥 친구의 운명을 느꼈는지도 모르지. 사청현이 한들한들 걸어 목표하던 객잔 입구로 향하며 한바퀴 빙글 돌았다.

“그럼 알 것 없는 형씨. 내가 꼬치 하나 얻어다줄 테니까 잠깐 기다려요.”

그렇게 말하며 사내에게 우산을 들려준 사청현이 객잔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알아본 주인이 반갑게 인사하며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다. 활기찬 사청현이 여기저기 인사를 받아 손을 흔들어주며 웃었다. 그는 살갑게 웃으면서 적절한 선을 지키는 기예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미 술에 반쯤 취했음을 생각하면 그것도 퍽 재주였다. 그러더니 또 가볍게 움직여 옆 탁자로 향하는 꼬치구이 두 개를 집어들곤 한바탕 웃었다. 그걸 들고 잠시 기다리니 사청현이 주문한 듯한 찬합을 점소이가 건네주었다. 은전으로 값을 치룬 그가 의기양양한 걸음으로 객잔을 나와 사내에게 꼬치 하나를 내밀었다.

“자, 형씨. 여기는 꼬치구이가 가장 맛있어.”

“…….”

잠시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사내가 고개를 젓고는 꼬치구이 하나를 받아먹었다. 그는 그렇게 석연치않은 얼굴을 했으면서도 꼬치에서 고기를 끌어내 씹는 것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배라도 고팠던 거야? 옆에서 오물거리던 사청현은 어느샌가 그가 우산을 받치기 시작했음을 알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이젠 저기로 갑시다.”

“다 산 게 아니었나?”

“신년인데 그걸로 만족할 수는 없지. 어서 가요, 가요.”

또 한바탕 위풍당당하게 객잔을 휩쓴 사청현이 이번에는 또 다른 찬합과 함께 나무젓가락에 꿴 고기를 가지고 돌아왔다. 한 짝씩 받아든 사내와 사청현이 함께 우물우물하며 찬 거리를 걸었다. 갓 구워낸 고기는 두툼하면서도 양념이 잘 되어 한입 베어물면 육즙이 넘쳤다. 고기가 뜨거워 입김이 솟는다. 그러면 눈 내리는 위로 흰 빛이 더해지는 것이다. 술기운에 훈기 가득한 사청현의 눈에는 그 모두가 어여삐 보였다. 걱정도 하나 없고, 오로지 즐겁기만 한.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자 이제 드디어 사청현의 손이 가득 찼다. 찬합 여러개를 마지막에 들른 객잔에서 받아온 새끼줄로 묶어 들며 그가 하하하 웃었다.

“다 샀다. 이걸로 알차게 먹겠네.”

“한 곳에서 사면 될 것을 뭐 하는 짓이냐.”

“전부 맛있는 음식이 다른 걸 어떻게 해요. 내가 주는 것마다 다 잘 먹어놓곤?”

사내가 무덤덤한 눈으로 사청현을 바라보았다. 가는 곳마다 온갖 사람들이 그를 반겼다. 이 도시에는 오래 있었던 모양이었다. 특별히 밤길을 함께 걸을 친구는 없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잘 지냈다. 먹을거리를 나누어주고, 신년 안부를 묻는다. 이 환한 길이 전부 그의 집이라도 되는 마냥. 온 도시의 복을 조금씩 나눠받아 그 빈 자루를 전부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내의 눈매가 가늘게 좁혔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양 돌아섰다.

사청현이 찬합이 무너지지 않도록 고쳐들며 저를 보는 그에게로 마주 시선을 돌렸다. 이 사람은 계속 냉랭한 소리를 하면서도 사청현의 머리 위로 눈이 쏟아지는 것은 막아주었고, 우산을 받쳐주었으며, 그가 객잔 서너 개를 돌 동안 따라와주었다. 착한 사람이었잖아. 어쩌면 오늘 괜찮은 지음을 만난 걸 지도 모르지. 사청현이 사내의 속도 모르고 한가롭게 생각하며 물었다.

“이제 형씨는 어디로 가요?”

“네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말동무까지 해주었는데 내가 어찌 상관을 안 한담? 이제 무얼 할 건데요?”

그리 묻자, 사내는 묵묵한 눈으로 그를 들여다보았다. 사청현은 영문을 모르고 눈을 깜빡였다. 이 자는 어디서 온 건지, 무얼 하는 사람인진 몰라도 눈 아래가 아주 깊었다. 그래서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면 아주 넓고 광활한 무언가를 직시하는 기분이 들었다. 넓은 사막이라거나, 그 비슷한 것. 흑백의 대비가 뚜렷한 그 눈은 어딘가 요요한 느낌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귀하고 또 강인한 면이 있었다. 계속 보기에 좋은 눈이네. 사청현이 대답을 채근하듯 그의 팔을 제 팔로 툭 쳤다. 한참만에야 그가 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

“이루고 싶은 건 없고요?”

“다 이루었다.”

“하고 싶은 건?”

“다 했어.”

“그럼 돌아가고 싶은 곳은? 사람이라거나.”

“…….”

건성인지 아닌지, 흘러가듯 대답하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떠돌이처럼 보이더라니. 사청현은 그가 저를 보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다. 그도 어릴 적에는 꽤나 떠돌았지. 형과 함께였지만. 그걸 이 사람처럼 집도 절도 없이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연민이 들었다. 사청현은 이래저래 친하게 굴기는 하여도 마음을 쉬이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겐 이리도 쉬이 주고 싶은 건 그의 독특한 분위기 탓일까? 어쩌면 정말로 제게 거절하면 불타오르는 성향이 생긴 걸지도 모르고. 사청현이 고개를 주억이다가 대뜸 사내의 등을 철썩 내리쳤다.

“뭐야, 섣달 그믐에 외롭게. 그럼 내가 친구가 되어 줄게요. 어때?”

“……누가 네 친구지?”

“마음 넓은 사청현 대인이시지, 누구기는?”

자아, 우리 집은 저쪽! 사청현이 우산을 쥐고 방향을 바꾸었다. 무어라 대답하기 전에 얼결에 끌려온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사청현은 짧은 사이에 그를 간파한 뒤였다. 그렇게 얼굴 잔뜩 찌푸리면서, 결국 가버리지는 않잖아? 이 사람은 다정했다. 이유도 모른 채로 그것이 기뻤다. 헤실헤실 웃은 사청현이 머무르는 집 앞에 멈춰 서서 사내를 돌아보았다.

“갈 곳이 없거든 아까 세 번째 객잔에서 자요. 루씨 누님이 청소 솜씨가 좋아서 방이 참 깨끗하니까.”

“필요 없다.”

“아까처럼 아무데나 앉아있으려고 그래요? 형씨, 아무리 섣달 그믐이라지만 그런 곳에서 밤을 지샜다가는 승천하고 말 거야.”

그리 말한 사청현이 한 걸음, 제 집 처마 아래로 건너가며 우산 아래를 빠져나갔다. 우산은 여전히 사내의 손에 들려 있는 채였다. 눈은 아직도 펄펄 내리고 있었고, 이것은 마치 세상을 덧칠해 온통 흰 빛으로 물들인 다음 다시 색을 칠하려는 것 같다. 그런 하늘 아래서도 사내가 우산을 돌려주려는지 살을 접으려 하자, 사청현이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 아니. 난 집에 왔잖아요. 그건 형이 가져가.”

“…….”

“줘도 싫은 얼굴은 한담?”

사내는 눈 오는 길가에 서서 사청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처마 아래에 선 사청현이 빙긋 웃으며 그 시선을 받아쳤다. 오래 본다고 해도 그다지 싫은 맘이 들지 않았고 어쩐지 볼수록 익숙하기만 했다. 잠시 그렇게 그를 응시하던 사내가 대뜸 손을 뻗었다. 그래도 불쑥 손이 다가오자 사청현이 조금 놀라서 눈을 둥그렇게 떴다.

뻗은 손은 사청현의 옷깃에 닿았다. 툭툭 매만지는 것이, 하도 화기애애하게 걸어다니다가 깃이 다 뒤집어진 모양이었다. 그 손길이 이상하게 다정한 것 같아 사청현은 문득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껏 그렇게 재잘재잘 떠들었음에도 그랬다. 사내는 그렇게 꽤나 한참 사청현의 목깃 언저리를 만져주더니, 그 다음에서야 반걸음 물러났다. 어쩐지 칠칠맞은 그를 돌봐주는 형이나 오랜 친우같은 기분에 사청현은 무언가 말로 할 수 없이 묘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 대체 뭘까?

하지만 사청현은 사내의 얼굴에서 생각을 읽을 수가 없었다. 물러난 그가 사청현의 발치 근처를 손으로 가리켰다. 반사적으로 내려다본 사청현이 오잉, 동그래졌다. 그의 발 아래에는 언제 두었는지 등불이 하나 있었다. 부채를 조각한 나뭇대를 검은 천으로 감싼 것이었다. 특이한 검은 등불은 그러나 그 안에서 새어나오는 흰 빛으로 인해 조금도 어둡지 않았다. 이 사람, 이걸 몰래 내려놓으려고 한참 만진 거 아니야? 사청현이 신기한 기분으로 등불을 들어올렸다. 이건 선물인가? 그를 물으려 고개를 들었더니, 사내는 흰 우산 아래 얼굴을 가리고 서 표정이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청현의 호흡을 가로채며 그가 고했다.

“나는 친구같은 건 필요 없어. 그런데도 온 건 너다.”

아득한 세월, 수없던 새벽, 그리고 어김없는 신년의 밤에도.

“남은 건 네 복이고 네 업이니.”

멋대로 살아. 우산 아래서 넓고 광활한 사막처럼 버석한 음성이 툭 떨어졌다. 홀린 듯 그를 듣던 사청현이 문득 손을 뻗어 그를 잡으려 들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바람이 휙 불어닥쳤다. 옷자락이 단숨에 날릴 만큼 거센 바람이었다. 놀라 눈을 감은 사청현은 돌아보면 그가 없을 것을 직감했다. 아니나다를까, 다시 뜬 눈 앞에는 아무도 없다.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한 얼굴로 사청현이 사방을 살폈다. 하지만 지나는 사람이 한가득인데다 온 사방이 시끌시끌해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었다. 다들 바람 좀 봐, 하며 제 옷자락이며 날려간 모자를 줍느라 또 소란이었다. 제 손에 들린 등불과 거리를 번갈아 살핀 사청현이 결국 이도 저도 못하고 그저 한가득 웃어버렸다. 이런, 부끄럼쟁이같으니. 인사라도 하고 가면 좀 좋아?

사내가 들으면 헛소리 말라고 일축할 생각을 꿈꾸며, 사청현이 등불을 고이 들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 바람이 불었는데도 이 등불은 기름을 많이 먹였는지 참 멀쩡했다. 소복소복 쌓인 눈길을 걸어 부엌으로 향한다. 찬합은 형이 올 때까지 뜨끈하게 정리해두기로 하였다. 형이 늦어도 섣달이니 밤을 지새는 게 좋겠지. 그 후에 방으로 돌아와 등불을 정리했다. 창가를 보니 눈발이 점점 더 굵어지고 있었다. 아마 이 눈은 새 해가 되어도 멈추지 않을 모양이다. 그렇게 이 세상을 다 쓸어내버리면 하늘의 기분도 좀 풀리게 되는 걸까?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형이 오기 전에 눈사람을 만들면 혼날까, 하고 생각하던 사청현이 문득 오늘 만난 그 친구를 다시 떠올렸다. 얼음으로 빚은 것 같은 그 사람, 순식간에 녹아버린 것처럼 사라졌지.

그는 아직도 눈 아래를 헤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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